music - records [아끼는음반 01]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집: 도쿄 사중주단 두번째 전집 2014/08/31 08:39 by hammondog

유머, 희열, 슬픔, 사색, 고뇌, 투쟁, 초월.  베토벤 음악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르가 아마 현악사중주가 아닐까.

클래식음악 가운데 특히 심오하고 어려운 작품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는 게 베토벤의 후기 현사다.  어렵다고들 하니 괜히 오기가 생겨, 린지 사중주단의 첫번째 전집('84)에 포함된 후기 번호들을 줄창 듣기 시작한게 2004년이었다.  지난 10년간 베토벤 현사와 함께 해온 소감이라면, 초기나 중기라고 해서 만만하거나 쉽지만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작곡된 시기에 관계 없이 내가 베토벤 현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열쇠는 인간감정의 "변덕스런" nature에 대한 공감이라는 것.

일반적인 경향에 따라, 베토벤 현사에서도 진중하거나 심각하거나 치열한 느낌의 연주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취향은, 어떤 작곡가의 작품이든 한음 한음에 담긴 정서와 잠재력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내어 들려주려는 연주보다는, 반걸음쯤 뒤로 물러서서 내가 나만의 고유한 체험으로 채워넣을 공간을 남겨두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린지 사중주단이 내 귀를 처음 열어주었다면, 베토벤 현사에 본격적으로 애정을 갖게 해준 건 알반 베르크의 첫번째 전집('78-'83)이다.  
정숙한 승차감의 세단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의, 정교하고 유연하며 직진형인 연주다.  두번째 전집('89)은 라이브인만큼 정교함이 약간 덜한 대신 실황의 열기가 청자를 사로잡는, 역시 멋진 연주다 (이젠 Warner가 된 EMI가 두번째 전집을 박스 하나로 묶어 재발매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데 두 전집에서 공통적으로 아쉬운 건, 짧게 스쳐가는 화성이나 리듬은 조금 여유롭게 짚으면서 공간을 확보해줘야 그 효과가 살아나는데, 그런 부분들까지도 대부분 swift하게 넘어가는 바람에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듣다보면 이분들이 다분히 그런 결과를 의도한 게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못내 아쉽다.



이탈리아 사중주단의 전집('67-'75)은 여유로운 템포 가운데 적당한 장력과 쾌적함을 유지하는, 균형감이 두드러진 연주다.  음색의 윤택함과 풍성함은 으뜸이며, 특히 Op. 18-3의 1악장, Op. 74의 1악장 등에서 화사하고 싱그러운 초여름같은 그들의 장점이 한껏 드러난다.  필립스의 뛰어난 아날로그 음질도 플러스.  하지만 진폭이 크지 않고 조였다 풀었다 하는 재미가 덜한 탓에, 1, 2, 3, 4 악장의 분위기가 얼추 비슷하게--자칫 지루하게--들리는 때도 있다는게 약점.  특히, 정교한 테크닉으로 내달리거나 (Op. 59-3의 4악장 등)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긴장감이 요구되는 곳에선 (대푸가 및 여러 스케르초 악장들) 아무래도 좀더 현대적인 악단들의 연주가 더 큰 감흥을 준다.



에머슨 사중주단의 전집('94 & '95)은 마치 프랭크 밀러의 graphic novel을 보는듯한 느낌의 연주다.  빠르고 격렬하면서도, 스쳐지나가는 화성 하나, 리듬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모두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세심함이 놀랍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튼튼하다.  한눈에 분위기와 의미를 전달하는 회화적인 특성과 읽으면서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서사적인 특성을 겸비한 연주.  각 악기의 음색 자체가 특별히 아름답거나 한건 아닌데, 네 악기가 따로 또 함께 하는 긴밀함은 내가 들어본 연주들 중 최고다.  흥미로운 건 두 바이올리니스트가 작품에 따라 1, 2바이올린을 바꿔서 맡는다는 점, 그리고 첼리스트가 1993년산
악기로 연주한다는 점.  모든 순간이 너무 선명하다보니 쉼없이 계속 듣기에는 부담스럽고 피로가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다.



[9월 22일 추가] 2005-2008년에 걸쳐 녹음된 도쿄 사중주단의 두번째 전집이 최근 깔끔한 박스로 묶여 재발매되었다.  알반 베르크, 이탈리아, 에머슨을 삼각형의 세 꼭지점으로 본다면, 도쿄 사중주단의 이 전집은 그 중간쯤에서 그들의 장점을 고루 갖추면서 거기에 자신들의 색깔까지 입힌, 더할나위 없이 매력적인 음반이다.  풍성하진 않지만 은은히 빛나는 음색을 바탕으로 섬세하면서도 담백한 노래가 상당히 속도감있게 흐르는데, 여기에 비브라토를 억제한 가볍고 투명한 보잉을 군데군데 도입한 것이 큰 플러스로 작용하는 것 같다.  무게중심이 확실히 1바이올린과 첼로에 있고 2바이올린과 비올라는 서포팅에 충실하다는 점도, 여기서는 단점보다 장점으로 다가온다.  어떤 사중주단에게든 베현사는 거대하고 험준한 산이겠으나, 이 전집에선 극복/정복의 느낌보다는 이분들이 이 작품들을 대하는 애정과 긍정적인 기운이 더욱 두드러지게 다가온다.  현 시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현사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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